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두려움을 없애는 비법
    카테고리 없음 2022. 4. 29. 10:05





    -
    오늘 제목은 어그로다. 타이틀은 어그로를 좀 끌어야 캐치하다. 공무원시험합격은 에듀윌이 아니라 수년간의 노력인 것처럼. 두려움을 없애는 쉽고 빠른 방법은 없다. 쉽고 빠르게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이다. 무의식 저편으로 보내고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거 잘 되시던가? 나는 자기 합리화와 남 탓의 달인인데도 잘 안 되더라.

    나는 수많은 두려움의 화신인데, 나의 두려움을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나의 외모를 남들이 판단하는 것이 두렵다. 못생겼다고 싫어할까 봐 두렵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피할까 봐 두렵다. 바람이 불면 앞머리가 날려 M자 탈모가 드러날까 봐 바람을 두려워했다. 씻지 않고는 아주 친한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친구가 내 냄새를 싫어하는 게 두려워서.

    이런 두려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학대한다. 이런 건 사춘기 때 극복했어야지! 내 마음의 전문 분야인 합리화도 잘한다. 냄새난다고 뭐라고 하는 놈은 친구도 아니야.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잘못된 거야! 행동력 있게 외모를 개선하기도 한다. 900만 원 돈을 내고 6시간의 수술을 받아 모발이식을 받았다. 어찌나 아프던지...

    두려움은 삶을 제약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두렵지 않은 방향으로 삶을 틀어버린다.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삶의 매 순간 무의식에서 나를 조종한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수많은 명제와 가치관, 소위 믿음. 그 잘못된 믿음으로 삶을 살게 된다.




    -
    운전은 아주 두려운 일이다. 자동차가 주는 강력한 효용이 없었다면 미친 짓에 가깝다. 시속 100키로 이상으로 달리는 쇳덩어리 안에서 어설픈 사람들이 그것을 조종한다. 지능지수 100이 무슨 의미인 줄 아는가? 평균이다. 50%의 인간은 지능이 100 이하다. 지능 60, 70도 운전면허가 있다. (절대 비하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그렇다는 겁니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수백만의 현대인이 운전면허가 있다. 알콜 중독자도, 아직 검거되지 않은 마약중독자도 운전면허가 있다. 어제 잠을 2시간밖에 못 잔 사람도 운전대를 잡는다. 도로 위에서 고속의 쇳덩어리를 타고 도로교통법이라는 희미한 약속으로 그들과 만난다. 중앙선이라는 얄팍한 약속. 언제라도 침범될 수 있는 의미 없는 노란 선. 그걸 믿지 못하면 절대 제정신으로 운전을 할 수 없다. 나는 이거 안 넘어갈 건데 설마 너희들도 이걸 안 넘어오겠지?

    운전을 처음 배울 때는 도로교통법에 기반한 운전자들 간의 약속에 대해 잘 모른다. 학원 선생님이, 연수자가, 부모가, 친구가 그 약속들을 알려준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 운전자는 이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렇게 하고... 끼어들기는 이렇게... 유턴할 때는 이쪽을 확인하고... 그 약속들을 모두 숙지하기 전에는 얼마나 운전이 두렵던가? 나 자신의 미숙함보다도 운전자들 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뭔지 몰라서 두렵지 않던가? 바퀴 달린 쇳덩어리를 내 손발처럼 잘 조작할 수 있게 되더라도 다른 운전자에 대해서는 믿는 수밖에 없다. 술에 취한 운전자가 중앙선을 넘어오는 상상을 계속한다면 운전을 할 수 없다.

    운전의 공포를 매 순간 의식하면서 운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의식 저편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위험은 항상 있기 때문에 속도를 높일수록 무의식은 바짝 긴장하고 예민해진다. (그걸 스릴이라는 신호로 해석하는 인간들도 있다. 인간은 두려움을 즐긴다.) 운전을 하는 이상 이 두려움은 절대 없앨 수 없다. 의식하느냐 의식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운전대를 잡으려면 이 두려움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위험이 있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이 합리화든 현실부정이든 어떤 마음의 트릭을 써서든 간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운전을 절대 할 수 없다.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
    일상에는 운전보다 위험한 행동이 거의 없다. 직장을 구하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왜 두려운가? 직장에서 고통받다가 스트레스로 사망에 이를 확률보다 졸음운전 화물트럭에 깔려 죽을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더 높아 보이지 않는가? 더 높지 않더라도 사고의 위험은 무시하고 잘만 운전하고 다니면서 직장은, 사업은, 연애는, 인간관계에서는 있지도 않을 걱정들을 '만들어서'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손에 꼭 쥐고 발발 떨면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으려고 한다. 덜덜 떨겠습니다. 그것이 '두려움' 이니까. (끄덕)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유명한 스승이 길을 걷고 있었다. 똥물에 잠겨서 얼굴이 찰랑찰랑하며 간신히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스승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다. "선생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 파도를 일으키지 않게 해 주세요. 똥물이 코로 들어와서 숨을 쉴 수가 없다구요!" 스승은 대답했다. "똥물에서 나오면 숨을 쉬기 편하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다시 부탁했다.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이 파도만 일으키지 않게 해 주세요!!!"

    두려움은 똥물을 붙잡는 인간의 욕심이다. 두려움에서 나와서 자기가 있던 똥물을 들여다보면 이깟 똥물에 갇혀 있었던 것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온다. 동시에 스스로가 불쌍해진다. 눈물이 날 정도로. 자기가 똥물을 만들고 들어가서는 바람이 분다고 사람들이 파도를 일으킨다고 화를 내며 바람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
    나는 한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그 두려움을 직시하지 못했다. 일하는 것은 원래 힘들다고. 세상 사는 게 어렵고 고통이라고. 다들 이렇게 산다고 합리화만 했지 두려움을 직시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고 그 두려움이 사라졌는가? 환자의 말투가 조금만 무뚝뚝해도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두려움에서 도피하기 위해 술도 마셨다. 술을 마셔서 두려움이 줄었는가?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퀭하면 눈을 뜨고 출근하는 순간부터 오늘은 환자가 오지 않기를 빌었다. 아니 적당히 오기를 빌었다. 환자가 와야 돈을 번다는 조급함. 환자를 돈으로 보고 있다는 자책. 두려움에서 시작된 내면의 전쟁. 현실의 환자를 만나기도 전부터 이미 나는 그로기 상태였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똥물 안에서 코만 내놓고 환자를 만났다.

    나는 용기를 내서 두려움과 직면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가? 환자가 오는 것이 왜 공포인가? 나는 환자에게 돌팔이로 보일까 봐 두려웠다. 침 한두 번에 낫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환자의 눈빛이 두려웠다. 돈과 얽혀있고 나의 에고와 얽혀있는 데다가 합리화와 남 탓으로 왜곡되어 두려움의 실체를 보기가 너무 어려웠다. 두려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댔다. 그 어려움을 뚫고 솔직하게 나 자신을 직면해서 알아낸 가장 뿌리 깊은 두려움은 아주 보잘것없는 망상이었다. '쓸데없는 인간으로 보일까 봐'였다.

    어? 이게 진짜 두려울 일인가? 내가 예수도 아니고 모든 이를 어떻게 낫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저 사람이 진심으로 침 한방에 낫기를 바랄까? 설령 그렇게 말은 한다 해도 진짜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건가? 그냥 자신의 몸을 좀 관심 갖고 봐 달라는 뜻은 아닌가? 아니! 그 사람이 그런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내가 그걸 들어줘야 하는 의무가 있나? 양심에 따라, 그간 한의사로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다만 노력할 뿐이다. 노력의 대가가 일도쾌차라는 결과로 꼭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과가 좋아야만 한다는 것도 나의 강박이 아닌가? 아니 다 떠나서 쓸데없는 인간으로 보이면 좀 어떠냐! 네가 그렇게 대단해야 속이 시원하냐!? 이 오만한 인간!!

    나는 두려움 자체를 받아들였다.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 망상을, 그 믿음을 탐구했다. 그 뿌리를 캐냈다.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두려움은 환자에 입힌 나의 망상이다. 환자는 실존하지만 실존에는 선도 악도 시비도 없다. 환자는 그냥 환자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 환자에게 나의 기대와 욕망을 투영하기 때문에, 결과를 욕심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고 망상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환자를 환자로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환자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고 애쓰지 않을 것 같다. 환자를 나의 두려움으로 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두려움을 만드는 나의 망상을 믿지 않아야 한다. 현실이 너무 명약관화해 믿을 수밖에 없다면 그 대상을,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의식적으로 내려놓아야 한다. 나의 행동을 제약하지 않도록. 삶을 숨 막히게 하는 가짜 두려움들을 파악해야 한다. 물론 실제적인, 효율적인 두려움도 있다. 그런 건 얼마든지 두려워하면 된다. 두려움은 아주 효율적인 위험회피 도구다. 생존기계인 인간은 도구로서의 두려움을 진화시킨 것이다. 두려움을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 말고.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