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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난민기구 후원
    카테고리 없음 2022. 4. 30. 08:44

     


    자전거를 끌고 역 앞을 지나고 있었다. 유엔 난민기구 후원 모집을 하는 남자를 보았다. 예전 같으면 눈길도 안 주고 지나쳤을 텐데 문득 관심이 생겨 멈춰 섰다. 피난길에 오른다면 뭘 가져갈 것이냐는 질문과 보기 4가지. 돈/여권/식량/옷 중에 골라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했다. 스티커가 가장 많이 붙어있는 정답지는 식량이었고 나도 식량에 스티커를 붙였다. 그는 퀴즈쇼 호스트처럼 땡! 을 외치고 정답을 알려줬다. 정답은 여권이었다. 여권만 있으면 돈, 식량, 옷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주는 게 바로 우리 유엔 난민기구 UNHCR입니다. 우리에게 돈을 내세요.

    정답을 맞히지 못해서였을까? 뭔가 이 남자와의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어서 자신의 외모를 유엔 난민기구 홍보대사인 정우성과 비교하는 유머를 날렸다.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불쾌감이 들 정도로 맥락도 맞지 않고 재미도 없는, 기분만 나쁜 외모 관련 유머였다. "정우성만큼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저도 한 얼굴 하죠? 저를 보고 후원을 해주려고 하신 거죠? 하하하" 어색하게 같이 웃고 나서 그는 본격적으로 나름의 감정을 담아 후원을 요구하는 레퍼토리를 시작했다. 아주 열심히 연습한 것 같은 멘트.

    멘트들은 대부분 돈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데 돈이 들고.. 저런 일을 하는데도 돈이 들고.. 물과 식량을 지원했으며.. 기부금을 얼마를 내면 얼마 소득공제가 되고.. 난민과 아이들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도 의심되긴 하지만 정말 한마디도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질문에서 내 답변에 당황하기까지 했다.

    "우크-러 전쟁으로 고아가 많이 생긴 건 아시죠? 지금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엄마가 제일 필요할 것 같은데요." "네?? 어... 그런 대답은 처음 듣네요. 어... 음... 아이들에게는 안심하고 잘 곳이 필요합니다! 이케아에서 단돈 천 원짜리 문고리를 달아줬더니 난민촌 성범죄가 80프로 감소하여..."

    돈 얘기를 하는 이유는 너무 당연하게도 내가 돈을 내기를 바라서였다. 일시불로 소액만 하겠다는 나를 온갖 소득공제로 꼬드겼다.(이게 진짜 혹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 번도 넘게 언급한 듯.) 긴급구호가 이뤄지려면 3만 원 이상을 정기적으로 후원해야만 한다고. 3만 원 중에 공제받으면 2만 원 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니가 그걸 왜 계산해줘?)

    나는 개원 준비 중이고 현재 소득이 없기 때문에 마음 가는 만큼만 일시 후원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갖은 이유를 대며 정기후원으로 이끌었다. 이미 이 남자를 싫어하게 된 나는 그냥 갈까 하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자세한 후원방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정기후원의 허점을 찾아 내 생각대로 자동이체 한번 하고 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도 나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그런 방법을 알려 주었다. 아마 그에게는 정기후원자를 한 명 낚는 것이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 것 같았다. 정기후원서를 작성하면서 넌지시 물어보자 그는 유엔 난민기구 소속은 아니었고, 자원봉사도 아니고 이것이 직업이라고 했다. 자랑스럽게 자기 소득의 70%를 후원하고 있노라고. 소득공제를 받아 사실 70%를 내지만 많이 돌려받는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 사인을 마치고 가려는 나에게 기필코 마지막 덕담까지 해 주었다. "오늘 후원도 하셨으니 앞으로 좋은 일만 있으실 거예요! 개원하실 때 복 받으실 거예요!!"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해줘야만 했다. "말씀 감사하지만 복 받으려고 후원한 거 아닙니다." 그는 아랑곳없이 다시 한번 정우성과 자신의 외모를 비교했고 이번에는 웃지 못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5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금발의 백인 여자아이.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우크라이나 난민. 그 아이는 왠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수용소에 있었고 나는 그 아이를 인터뷰하는 사람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 아이는 나에게 작은 초콜릿을 주었다. 수줍게 초콜릿을 내 손에 올려주고 돌아서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모종의 이유로 수용소에서 살처분되었다. 뭔가 장례식 같은 순간에 잠에서 깼다.

     

    만약 기분좋게 후원을 했었다면 더 밝은 꿈을 꿨을까. 후원을 받던 남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후원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타인을 돕는 행복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 남자와 관계없이 후원은 좋은 일이다. 조금씩 더 다양한 방법으로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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