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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체적인 삶
    카테고리 없음 2022. 5. 3. 07:26




    나. 자아. 자기. 자신. 신체. '나'라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있을까.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물 61.8%, 단백질 16.8%, 지방 1.49%, 질소 3.3%, 칼슘 1.81%... 를 섞는다고 '나'가 되지 않는다. 인체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들 한다. 나의 체내 수분을 체성기관들이 밀리초단위로 측정해서 목이 마르게 만들고 땀을 내게 만들고 있다. 이걸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생리학적으로는 모르는 게 맞다. 바이러스가 체내에 들어오면 엄청난 전쟁이 일어난다. 수천억의 면역세포와 바이러스 간의 전쟁. 전신이라는 거대한 전쟁터. 그 전쟁을 세계의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병리학적으로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몰이해가 아직도 심한 것이다. 인류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과학과 의학은 작은 바이러스 하나도 정복하지 못하고 전세계의 문화 사회 경제에 치명타를 입었다. 인간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대체 얼마나 모르고 사는 것인가? 아니 아는 게 뭐냐?

    내가 나에 대해 아는것. (안다고 착각하는 것) 그것이 자아다. Ego. 내가 나 스스로에게 심리적으로 부여한 이미지.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래야 한다. 나는 저래야 한다. 그 믿음. 이미지와 믿음은 효율적이며 무섭도록 강고하다. 도구이면서 감옥이다. 나와 세상을 마구 베는 칼이다. 교류분석이라는 상담심리학의 일파가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Eric Berne에 의해 생겨난 망상이다. 그는 나 라는 것을 자아와 주체로 구분했다. 자아는 또 어버이, 어른, 아이의 세 단계로 또 구분했다. (이런 구분을 한 거 보면 엄격한데 성숙하지는 못한 부모 밑에서 자랐나 보다.) 오늘은 이 망상에 대한 내용에다 칸트와 융의 Self에 대한 추가적인 망상과 나의 망상도 몇 줄 덧붙이려고 한다. (말이 좀 심하지만 망상이 맞다. 어떤 권위가 있든 간에.)

    에릭에 의하면 세 가지의 자아가 있다고 한다. 선천적인 욕구와 감정, 그 욕구와 양육자의 요구가 충돌하여 결과로써 안정된 것을 어린이 자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욕구와 감정은 무의식으로 쫓겨난다. 양육자의 말과 행동을 내면화한 자아가 또 따로 있다. 그것이 어버이 자아다. 꼭 양육자는 아니고 중요한 타인의 목소리도 포함한다. 여기에는 보호하는 양육의 목소리도, 비판적이고 비난적인 윤리적 채찍도 있다. 보통 이 자아는 양육자의 의도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 가난이 고통이었던 양육자는 자식에게 어떻게든 가난을 피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식의 마음에는 인생은 고통이고 돈이 최고라는 자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자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어른 자아가 있다. 자신에 대한 자각과 독창적 사고로 자립할 수 있음을 깨달은 자아다.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이 자아가 지나치게 두드러지면 약삭빠른 사람이 되고, 부족하면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이 세 가지의 자아는 서로 혼합되어있고 편견과 왜곡으로 뒤섞여 있다. 서로 배타적으로 싸우고 있기도 하다. 그 통합이 교류분석학의 정신분석, 상담 목적이 된다.

    교류분석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상담심리학에서는 꽤나 유명하고 유용한 도구이다. 이 설명이 얼마나 맞다고 생각되는가? 인간이 만든 모든 관념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망상인데, 인간심리를 분석하는 유용한 scope로 보인다. 정신이라는 '나'를 분석하려는 노력. 물 61.8%, 단백질 16.8%, 지방 1.49%, 질소 3.3%, 칼슘 1.81% 등으로 구분 지으려는 노력. 그렇게 구분하고 그것을 다 더한다고 절대 내가 아니며 알 수도 없다. 알 수 없지만 실존하는 존재 자체. 그것이 Self 이다. 칸트가 말한 물자체이다. 칸트라는 위대한 망상가는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하였다. 물자체는 객관적 본질 자체이다. 이것은 관념적으로만 존재함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절대 인간은 물자체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다. 현상, 표상으로만 파악한다. 빛의 스펙트럼으로 눈에 들어온 파장으로서의 현상. 소리와 냄새의 현상. 촉감의 표상. 내 마음속의 이미지. 칼 융은 이런 망상을 발전시켜 또 다른 멋진 망상을 만들어냈다. 그 이름도 멋진 분석심리학이다.

    분석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망상이다. 무의식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담겨 있다. 무의식은 사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부정되는 추세이다. 없다는 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인간 정신이 욕구 감정 이성 세 가지로 구분된다는 믿음이 현대 뇌과학에서 부정되고 있는 것과 같다. 구분이 안 되는 것이다. 구분되지 않는 것을 구분하겠다고 염병을...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효용이 있어서이다. 말이 좀 샜는데, 분석심리학에서는 자아를 표면으로 드러난 정신이라고 본다. 보이는 껍데기라는 의미다. 그 내부로 깊이 들어가면 콤플렉스, 그림자들이 나타나며 개인적 무의식, 집단 무의식으로 점점 깊이 들어간다. 그 가장 깊은 곳에는 자기, 즉 Self가 있다. 마음 전체의 중심이며 마음의 근원적인 원점이 되는 원형. 정신의 일체성을 유지하는 원동력. 융은 이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이 꿈이라고 보았다.

    교류분석학에서의 Self는 융의 Self와 좀 다르다. 칸트의 물자체에 가깝다. 깊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코어라는 이미지보다는 전체이자 객관적인 본질이기에 표상으로서 무언가를 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드러나는, 하지만 실존하는 물자체. 이미지적으로는 자아보다 더 큰 개념인 것이다. 물자체가 현상보다 큰 개념인 것처럼.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다 망상이다. 아주 재미있고 유용한 망상.)

    정리하자면 Self는 나라는 존재 그 자체이고, 타인은 물론이고 나 스스로도 다 알 수 없다. 일부만 인식된다. 굳이 구분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이 나눠지는데, 의식 중에서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 Ego이다. 자아를 확장하여 자기 자신, Self 가 되면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된 (무의식조차도 모두 의식하는) 전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바로 행동이다. 머릿속에서 망상으로는 뭘 못하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육체이다. 말과 행동. 말은 중요한 행동이자 정신과 실제 행동의 연결고리다. 자아이든 자기이든 행동에는 결과가 있고 책임이 있다. 그 결과와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주체 Subject 이다.

    주체성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산다. 주체적인 행동을 한다. 행동에 책임을 진다. 주체적이지 않은 사람도 있냐? 여기서 자아로 돌아간다. 자아에는 어린이 자아, 부모 자아, 어른 자아가 있다고 했다. 어린이 자아로만 사는 사람은 주체적이지 않다. 부모 자아로만 사는 사람도 주체적이지 않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분열된 자아들이 튀어나온다.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사람. 직업을 선택하고 사는 곳을 선택할 때도 아니 심지어 먹고 싶은 음식조차도 못 고르는 불쌍한 사람들. 혹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학대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아들의 선택을 따라 행동하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부모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책임으로부터의 도피. 남 탓.

    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 주체로서의 나. 원하는 것과 행동과 말이 모두 일치해야 행복하다. 여기에 타인과 세계까지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의 원하는 것과 나의 언어와 나의 실체로서의 행동 이 세 가지를 일치시키는 것만으로도 뼈 빠지게 어렵다. 대부분 못하고 산다. 여기에 타인의 욕망과 타인의 언어와 타인의 행동까지 일치시키려는 욕심을 부리고 앉았으니 인생이 고통이 수밖에. 더 나아가 선도 악도 아닌 현실까지 지 맘대로 바꾸고 싶어 하는 어리석음. 고통을 붙잡는 똥물 속의 인간. 비 오는 하늘을, 날 선 바람을 우러러 원망하는 어리석은 인간이여! 비와 바람은 존재 자체이고 거기엔 선악도 시비도 없다. 원망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내 고통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이면 내가 없앨 수 있다. 너무 당연하게도.

    나에 대해서 의식하고 탐구하여 주체성을 갖고 사는 삶은 내 맘대로 사는 삶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저항도, 반항도 아니다. 결과에 대한 허무주의도 아니다. 선택에 대한 진정성있는 고민이며, 결과에 대한 스스로의 뼈저린 책임감이다. 내가 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진다.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타인까지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존중받는다. 여기에 자유와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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