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즉각적인 행동을 위해 '필요'하다. 생존에 위협이 될 때 분석하거나 고민하고 자빠져 있으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 즉각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감정이 자동반응을 일으킨다. 바스락-두려움-도망-생존. 여기서 두려움을 가장 빨리 느낀 유인원이 살아남아서 자식을 낳고 낳고 낳아서 내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두려움이라는 생존패턴을 DNA 깊숙이 장착하고 태어난다. 어? 그런데 호랑이가 없네? 뭘 두려워 하긴 해야 할텐데?
재미있는 망상이지만 사실확인이 불가능하다. 최신 뇌과학자들도 불가능하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선천과 후천의 구분이 불가능하며 더 나아가 의미조차 없다고 한다. 구분이 안된다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존재의 이유는 인간의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게 유전자로 남은건지 문화로 대대손손 내려온건지 알 수 없다는 것 뿐. 우리 문화는 두려움을 가르친다. 불안을 학습시킨다. 자본주의는 심지어 열등감을 주입한다. 너 지금 부족하다고. 쟤는 페라리를 타는데 너는 모닝을 타고 다니니 열등하다고. 돈을 벌어서 우월해지라고 알려준다. 아니 우월해지라고 하지 않는다. '행복'해지라고 한다. 너는 돈이 없어서 불행한 거라고!
감정은 인생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에 금방 자본주의까지 연결된다. 자본주의에 대해 쓰려고 한 게 아니다. 감정이 어떻게 우리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감정의 목적에 대해서, 감정이 왜 있는지부터 생각해보자. 처음 말했듯 감정은 빠른 자동반응을 위해 사용된다. 손상에 대비한 즉각적인 행동. 꼭 육체적인 상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현대인은 정신적인 상처로부터 빠르게 도피하기 위해 감정을 사용한다.
한 환자가 어떤 약초에 대해 아시냐고 거들먹거리며 묻는다. 야~ 경희대 출신 원장님이네! 독고말이는 아시죠? 나는 즉각적으로 짜증이 난다. 아, 또 진상 왔구나. 또 약초꾼이 한의원에 납시었구나. 그 정도에 따라 짜증-화-분노 가 달라질 뿐 즉각적인 감정이 올라온다.
나는 독고말이에 대해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도꼬마리가 맞는 말이며 한의대에서는 그 열매이자 약재인 창이자라는 이름으로, 수백 종의 한약재 중 하나로 대충 배웠다. 게다가 본초학 중간고사를 보고 나서는 깨끗이 잊었음.) 이 사람이 나의 본초에 대한 무지를 자극했다. 한의사로서 있어 보이고 싶은 나의 욕심과 반대되는 현실을 직면시켰다. 수천가지가 넘는 약초에 대해 속속들이 한글명까지 알지 못한다는 나의 열등감을, 나의 무가치함을 직시하도록 강요했다. 나는 내가 무가치할까봐 너무 무섭기 때문에 절대 그 결핍을 직면하지 않는다. 그걸 떠오르게 만드는 이 사람이 너무나도 싫다. 화가 치민다. 즉각적으로 짜증을 내서 이 사람을 피한다. 미친놈, 진상이라고 규정하고 나의 정신적인 상처로부터 빠르게 도피한다. 아! 오늘도 진상 만났어!! 짜증나!!!!
진상으로 판단하는데 0.01초도 걸리지 않는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실체가 있는 생각들로 진상규정 프로세스가 이뤄졌는지 다시 짚어보자. 한의사로서 있어 보이고 싶은 욕심이라. 흠... 뭐 그럴 수 있다. 이건 넘어가고. 약초명을 그것도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한글 기원식물명을 모른다는게 내가 한의사로서 부끄러울 일인가? 이건 확실히 오바다. 한의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도, 그게 내가 무가치할 정도인가? 이것도 멍청한 생각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데, 사실 나는 무가치하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환자를 진상으로 만든다. 나를 무가치하다고 인정하기가 고통스러우니 타인을 비난한다.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인가? '나'는 완전히 무가치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정말 큰 가치를 갖고 있다. 정확히는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 이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깨닫기가 정말 힘들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긴다. 얼마인지 꼬리표를 단다. 시급 만원짜리 인간, 시급 100만원짜리 인간으로 분류한다. CF한편 찍고 몇억의 개런티를 받아가는 연예인을 보며 열등감과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돈을 벌고 쓰는 모든 순간에 나의 가치를 평가당한다. 그 평가의 두려움을 매 순간 겪으면서 스스로를 그 기준으로 평가한다. 평가 점수는? 당연히 불만족스럽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직면하는 건 너무나 고통스럽다.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합리화를 한다거나... 부가 편중되는 사회를 비판한다거나... 정부를 탓하고 부자를 탓하고... 이정도 월급밖에 안주는 회사를, 사장을 탓하고 공부를 제때 안시킨 부모를 탓하고 같이 놀던 친구를 탓한다. 이 전략의 목표는 하나다. 나의 무가치함을 직면하지 않는 것.
돈이라는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면 나보다 가치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수억명은 될 것이다. (나보다 가치없는 사람은 수십억임.) 나의 키로 말하자면 딱 평균인 174로 중간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학력, 사는 동네, 부모의 재력, 차, 부동산, 몸매, 얼굴, 크기(?), 근력, 체력, 지구력, 순발력, 지성, 감성, 목소리, 눈빛, 숨소리까지 모든 것을 순위 매길 수 있다. 한의사로서 '독고말이'를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까지도. 이런 쓸데없는 줄세우기로 나의 가치를 판단한다. 이 모든 것에서 1등이 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 자신의 무가치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 이 모든 평가기준에서 나는 한참 아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무가치한 나 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기로 했다. 그럴 수 있는 건 나 뿐이니까. 나에게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나 자신이다. '나'는 나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존재다. 아니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유일하므로. 나는 나에게 완전히 무가치하면서 동시에 하나뿐인 존재다.
나는 나의 '무가치함'을 직면했다. 세상의 가치기준에서, 그 판단에서 내가 무력하다는걸 받아들였다. 이걸 직면하는건 정말이지 호랑이 우리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받아들이고 인정한 만큼 편해졌다. 이제는 환자가 독고말이가 아니라 쬛퇽괡삻이를 아냐고 물어봐도 웃으면서 나는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모르는데 그게 뭐냐고. 한의대에서는 그런 이름이 아니라 한자명으로 배우고, 그나마도 시험 보고 다 까먹었다고 웃으면서 얘기해 줄것 같다. 그런걸 물어보시는거 보니 약초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그게 어디에 좋답니까? 그래요? 그럼 제가 본초학 책에서 좀 찾아봐 드릴까요? 아, 도꼬마리는 창이자네요. 창이자는 비염에 씁니다. 그래서 물어보셨군요. 비염에 많이 쓰는 한약으로는 소청룡탕 같은게 있습니다. 저는 여기까지밖에 몰라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건 여기까지라 미안합니다. 감정이 앞서면 환자의 요구를 왜곡한다. 진상으로 판단하고 짜증만 낸다. 환자도 당연히 미친 원장 잘못 만났다고 생각하겠지. 감정의 지배로, 나의 에고로 소통이 되지 않고 오해가 생긴다. 감정으로 인해 눈이 먼다.
짜증, 화, 분노는 모두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어흥 하면 도망치듯이 마음의 상처로부터 재빠르게 도망가도록 만드는 감정들이다. 두려움, 슬픔, 혐오, 우울, 수치심, 권태... 모두 나의 무의식으로 밀어놓은, 직면하기 싫은 나의 결핍으로부터 나의 에고를 보호하려는 자동반응이다. 에고를 보호하는 감정도피는 그만하자. 나 자신의 무가치함을, 보잘것없음을 직면하기 싫어서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삶은 그만 살자. 힘들더라도 직면해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으로 자동반응하며 살게 된다. 감정의 노예로 살게 된다. 남탓으로 도피하면서 살게 된다. 현실에 치이는 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반응만 하며 살게 된다. 단 한번뿐인 인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