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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가라사대, 고와 락은 하나다. 인생의 고통과 쾌락은 같은 것이다. 한의학에서도 말한다. 음극즉양 양극즉음. 음양은 하나다. 태극은 음과 양이 순환하는 괘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고통은 쾌락과 같다. 두려움은 행복과 같다. 빛은 어둠과 같다. 모두 내 마음 속에만 있다. 분별, 구분이다. 그 자체로 하나이고 통합된 전체인데 나눠서 보는 것이다. 고통과 쾌락은 욕구에서 온다. 내가 나의 욕구를 세우고 그 욕구가 채워지면 쾌락,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이다. 법륜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유튜브를 통해 나라는 중생에게 알려주었다. 고와 락은 하나다.
고통과 쾌락은 진정으로 하나다. 정말로 같은 것이다. 욕망, 욕심, 욕구 그 무엇으로 이름짓던 간에 내가 원하는 아주 개인적인 내 마음의 바램이 고통을 만들고 쾌락을 만든다. 그 욕구에는 생존본능도 있고 성욕도 있고 수면욕도 있고 식욕도 있다. 이런 기초 욕구들을 무시하고 고행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게 아니다. 욕구를 무시하는 건 욕구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성욕이 나쁘다고 규정짓고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일 수 있는가? 식욕이 나쁘다고 규정짓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식음을 전폐하는 고행이 어떻게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있는가? 욕구를 모두 충족하려는 쾌락주의도, 욕구를 모두 거부하는 금욕주의도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 뿐이냐? 사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는 같은 말이다. 욕구의 노예로서의 삶이다.
욕구로부터의 자유는 그저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마음에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분별일 뿐 현실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지 않았나?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그 상대성 속에서 나의 분별이 있을 뿐이다. 나! 나의 기준이다. 나의 욕심과 욕구에서 쾌와 불쾌가 나뉜다. 다시 말하지만 욕구가 모두 나쁘다는게 아니다. 나의 기준일 뿐임을, 그것이 선도 악도 아님을 알면 있는 욕구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면 이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겠다. 하루종일 보기 싫은 사람들과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스트레스에 아침도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퇴근길에 집앞 호프집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엄청난 식욕과 함께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하다. 이 간절함! 치킨과 맥주를 원하는 욕구에 저항해 본다. 곧 여름이고 살을 빼야 하니까 치맥은 곤란한데? 자기 자신과 싸운다. 우리 모두는 누가 이길지 잘 알고 있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다. 바스락거리는 치킨의 행복. 그 기름짐. 그리고 머리 끝까지 시원해지는 맥주 한 입. 여기가 극락이다.
치맥을 먹고싶다는 욕구는 나쁜 게 아니다. 좋은 것도 아니지만 나쁜 것도 아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일단 모든 알아차림의 시작은 선악의 구분을 좀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 내가 치맥이 먹고 싶구나! 판단하지 않고 일단 알아차린다. 관찰, 관조한다. 이 욕구가 정말 필요한 욕구인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욕구인가? 욕구의 노예가 아니므로 욕구의 타당성을 따져 본다. 이때 중요한 것이 욕구를 외면하거나 거부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 마음은 억누를수록 강해진다. 지금부터 호랑이를 생각하지 마! 호랑이 생각하면 죽여버린다! 호랑이 생각을 하는 놈들은 루저 패배자 병신이야!!! 억누름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호랑이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욕구를 통과시키고 내면의 싸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받아들임이다. 인정하면 약해진다. 치맥을 먹고 싶구나. 좋다. 오늘 힘들었으니 치맥이 땡길 수 있다. 치맥을 먹고 즐거웠던 나의 기억이, 나의 모든 세포가 치맥을 원하고 있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꼭 먹어야만 힘든 게 보상이 될까? 장기적으로는 안 좋은걸 뻔히 알지 않나? 이 욕구가 나의 생존과 번영은 고사하고 힘든 하루에 대한 해결책이라도 되기는 하나? 언 발에 오줌누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은 아닐까? 내일 아침에 어제의 나를 혐오하지는 않을까? 얇은 옷을 입으면서 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악순환이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욕구는 나쁜 게 아니다. 금욕주의는 쾌락주의와 완전히 똑같다. 욕구를 좋은것으로 규정하는지 나쁜것으로 규정하는지의 차이일 뿐 욕구의 노예다. 욕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욕구의 타당성을 생각해보면 이 욕구가 필요한지 아닌지 금방 알게 된다. 알아차리고 관조해 봤는데도 필요한 욕구면, 누군가에게(특히 나 자신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그냥 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욕구의 파도가 잠잠해진다. 그 고요함 속에서 욕구를 관찰해보면 대부분 별 것 아니다. 위의 예시에서도 사실 핵심은 '보기싫은 사람들' 과 '하기싫은 일' 을 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데 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내 입맛에 맞게 주변사람을 조종하고자 하는 욕심. 편하게 돈 많이 버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 이런 욕심과 욕구가 너무나 많다. 날이 흐리면 흐리다고, 여름이면 덥다고, 겨울이면 춥다고, 결혼하면 배우자때문에, 결혼하지 않으면 또 혼자라고 괴로워한다. 알아차리고 내려놓을건 좀 내려놓아야 자유롭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