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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레고를 정말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레고에 그만한 돈을 쓰기 아까운 어른이 되어버린 이유로 사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 2013년쯤 다시 레고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미래에 대한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마통을 탕진하며 레고를 수백만원치 사 모았다. 레고는 단종되면 재테크 효과도 있다는 핑계로, 나중에 돈 벌어서 마통은 금방 메운다는 핑계로. 레고를 둘 곳이 없어지자 그만두었지만 지금도 레고는 갖고 싶다. 어릴 때 내가 얼마나 레고를 갖고 싶어했는지, 부모님은 이런저런 조건을 걸어 레고를 사 주겠노라고 약속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대부분 학업성취도에 관련된 딜이었던 것 같다. 성적이 잘 나와서 레고를 받을 때의 기쁨. 레고는 단순 장난감이 아니라 트로피였다.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이었다.
나는 오감도 예민하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에도 아주 예민하다. 미움받는게 두렵다. 타인이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촉각이 곤두서 있다. 나를 믿지 못하거나 싫어하는 듯한 눈치라도 보이면 에고에 비상등이 켜진다. 내가 무가치하다는 걸 들키면 어떡하지? 들키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어기제를 발달시켰다. 쓸데없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세상은 차가운 곳이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거나,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라거나. 특히 굳게 믿었던건 세상에 나쁜 놈과 미친 놈이 대부분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래야 내가 받은 상처들이 정당화 되는 줄 알았다. 나를 평가하는 너희가 나빠!
이런 식의 자아수축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무거운 방어기제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된다. 너무 무겁고 괴로워서 내려놓기 시작했지만 잘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요새 가장 크게 느끼는건 인정욕구다. 나는 돈을 잘 벌고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그렇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 엄마가, 여자친구(곧 아내)가, 친구들이, 옆 가게 사장님이 나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너무 무섭다. 나의 내면에서는 돈에 대한 왜곡된 관념들을 많이 내려놓았지만, 타인들은 나를 돈으로 판단할 것이라는 (잘못된)믿음까지는 아직 내려놓지 못했다. 돈을 벌고 성공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타인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주지 못하는 사랑을.
사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 내면의 불안과 초조함, 괴로움을 파고들다 보면 결국 마주치는건 사랑 부족이다. 인정과 사랑 부족. 머리로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왜 채워지지 않는걸까. 나 자신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 부족한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된다. 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으니 외부에서 계속 채워줘야만 하는 게 아닐까. 외부에서 오는 인정은 그때그때 많고 적을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의 행동에 대한 결과로 오기 쉽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건 아닐까 싶다.
결국 정답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나 스스로 아무 조건없이 나를 사랑해야 불안이 내려간다. 나의 못난 부분과 어리석음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한 너무 엄격한 기준을 내려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기준과 조건이 없어도 괜찮다. 성과가 없어도 괜찮다. 실패해도 괜찮다. 손가락질 받아도 괜찮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자유와 평화가 있을테니까.